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차 중동전쟁 (문단 편집) === 시리아 전선 === 한편 요르단의 참전으로 머뭇거리던 시리아와 이라크도 참전했다. 시리아 [[미그]] 전투기들이 갈릴리 지역을 공습하기 시작했고 이라크 공군도 가세했다. 하지만 시리아는 이스라엘 공습 과정에서 '''무려 공군력의 3분의 2가 소멸하는''' 처참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현대전에서는 병력의 1/3을 잃으면 후방 재편성이 필요한 '''전투 불능'''(combat ineffective)으로 판단한다. 이런데 ⅔, 다시 말해 약 66%의 전력 상실은 그냥 시리아 공군력 전체가 지워졌다는 소리다.] 82차례의 출격 결과 [[Il-28]] 폭격기 2대, [[MiG-21]] 32대, [[MiG-17]] 23대, 헬리콥터 3기가 이스라엘 방공망과 이스라엘 공군의 반격으로 격추되었고,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드마이르, 다마스쿠스, 사이칼, 마르즈 리알 공군 기지도 모조리 박살났다. 덤으로 시리아 안에 들어와 있던 이라크 공군도 박살났다. 이스라엘 피해는 10대였는데, 4명의 파일럿은 전투기와 함께 죽었고 2명은 탈출했으나 시리아 민간인들에게 잡혀 끔살당했다. 하지만 시리아 국방장관 [[하페즈 알아사드]]는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공군력이 소멸했다고 또 거짓 뉴스를 내보냈다. [[시리아 대통령]] 아타시는 [[시오니즘]]과 [[제국주의]]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고 텔아비브에서 다 같이 만나자고 또 주접 방송을 내보냈다. 물론 이는 시리아 지도부가 받은 엄청난 충격을 숨기기 위한 허장성세였다. 시리아군 중앙전선 사령관 무스타파 틀라스 장군은 이스라엘군 공습에 죽을 뻔하고 후방으로 도주하였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후 그는 금연까지 했다. 그러나 알아사드는 이스라엘에 대한 더 강한 공격을 주장했고 골란 고원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라빈은 시리아 공습을 지시했으나, 다얀은 시리아 전선까지 열리면 감당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반격은 하되, 절대 시리아 민가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특히 수도 [[다마스쿠스]]를 작전 범위에서 제외했다. 한편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의 방어 상태를 떠보기 위해 키부츠들에 대한 소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T-34]]까지 앞세워 놓고는 키부츠 농민들의 처절한 반격에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다. 최종적으로 아랍국들 간의 상호 불신과 지휘 체계의 혼란으로 대부분 격퇴당한다. 그러던 와중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더욱 빨리 요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내부 깊숙이까지 진격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냈으나, 전선에서 싸우던 시리아군 장병들이 그 가짜 뉴스를 보고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 국제사회의 개입보다 더 빨랐다. 결국 그나마 끝까지 남아 있던 기갑부대가 요르단 강에 수장되자 시리아는 지상 공격을 아예 포기하게 된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박살낸 이스라엘은 마지막 남은 골칫거리인 [[골란 고원]] 요새에 대한 전면 공격을 결정하고 전력을 투입한다. 웨스트뱅크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을 장악한다는 목표 따위는 개전 시점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않고 있었으나 시리아의 계속된 자폭에 에슈콜 내각은 골란 고원 장악으로 전략을 선회하였다. [[골란 고원]]은 해발고도 500m의 바위산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엄폐물도 찾기 힘든 척박한 지역이었다. 거기다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인 땅에 4개 대대가 주둔하며. 두꺼운 1m 철판을 위에 덮는 콘크리트 요새를 짓고 요새 안에는 30대의 [[T-55]]를 넣어놓고, 지뢰와 다중 철조망과 장애물로 감싸놨기 때문에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소련 군사 고문단들도 [[마지노선]]에 버금가는 강력한 요새라고 했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에도 시리아군의 병력 상실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알아사드는 시오니즘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한편, 아랍 국가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며 특히 이집트의 지원을 갈망했는데 상술했듯이 처참하게 박살난 이집트라 시리아에 지원을 보낼 여력 따위는 없었다. 이스라엘군은 이 난공불락의 절벽을 [[전차]]와 [[기계화보병]]이 탑승한 [[장갑차]]로 돌파하려 했는데, 골란 고원은 강도가 약하고 자잘히 부서지는 [[현무암]]질 산이었기에 전차와 장갑차가 올라가지 못하자, 폭약으로 현무암 바위를 부수고 그 지역을 [[불도저]]로 길을 닦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엘리 코헨]]이 상세히 관찰한 골란 고원에 대한 정보들은 이스라엘군의 요새 점령에 큰 도움이 되었다.[* 6일 전쟁이 벌어지기 몇 년 전, 시리아의 기업가 사베트로 위장해 시리아군 국방차관까지 올라간 엘리 코헨이 골란 고원을 시찰할 당시 전선의 시리아군 병사들이 더위에 지쳐 있는 것을 보고 애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무들을 골란 고원의 주요 시리아군 진지에 제공했다.''' 시리아 군부는 병사들을 위한 그늘막이 제공되었다고 흡족해했고 일선 병사들도 당시에는 좋았겠지만 이 나무는 후일 오히려 독이 되어 '''심겨진 나무들이 진지들의 주요 위치를 이스라엘군에 정확히 알려주게 되었다.''']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의 [[포격]]을 뒤집어쓰며 처절하게 지뢰 지대를 돌파하고 장애물을 개척하느라 장갑차에서 전부 다 내려 차를 밀면서 진격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갑차가 대전차포에 맞고 격파되면 격파된 장갑차를 치워내고 남아 있는 보병들이 돌을 치우며 진격했다. 이리하여 여단 내 사상자 비율이 90%에 육박했으며,[* 이를 당시 피의 등산로라고 말했다.] 현무암을 부수고 길을 내느라 폭약을 모두 소진해 [[철조망]]을 돌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한 중대는 그동안 올라오느라 중대원 중 8명밖에 남지 않자, 부상당한 병사 몇 명이 자신의 몸을 철조망에 내던져 얼마 안 남은 전우들이 지나갈 수 있게끔 길을 만들 정도로''' 필사적으로 공세를 펼쳤다.[* 여단의 90%가 전멸하는 상황이라 다른 중대도 당연히 100명 중 10명, 9명밖에 남지 않았다. '''심지어 어느 중대는 3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9일 밤, 이스라엘군의 처절한 진격에 결국 수비대 본진이 얼마 안 남은 병력에 뚫리고 골란 고원의 지휘소가 점령되자 날이 밝기도 전에 나머지 진지에 있던 모든 병력이 철수해 버렸고 골란 고원에 이스라엘 국기가 올라갔다. 지금도 이스라엘군의 최정예 부대인 골라니 여단의 신화다. 이를 지켜보던 골라니 여단의 요나 여단장이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란 고원 진지에 이스라엘 국기가 게양되었고 이를 망원경으로 보던 여단장은 통곡했다고 한다. 경악스러운 패전에 시리아 정부는 우선 골란 고원에 살던 시리아인들에 대한 소개 명령을 내렸고 9만 5천여 명의 시리아인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서 피난길에 올랐다. 당연히 드루즈인과 체르케스인은 소개 명령을 무시하고 이스라엘군을 환영했다. 시리아군 지도부는 절망에 빠졌고 시리아군 총참모장 수웨이다니는 유대인들이 곧 [[다마스쿠스]]를 조질 것이며 아무도 유대인들을 막을 수 없다고 정부에 경고하였다. 이스라엘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시리아군 장성들은 다마스쿠스를 버리고 앞을 다투어 달아나는 추태를 보였고 이어 내각도 붕괴되어 주요 장관들은 금괴를 챙겨서 모조리 [[알레포]]로 달아났다. 다마스쿠스를 방어하는 부대는 고작 정권의 친위 부대였던 70여단 단 하나밖에 없었으며 골란 고원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로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점령한 시리아 장교 클럽에서 열린 이스라엘군 참모 회의에서 이스라엘군 북부 전선 사령관 다비드 엘라자르는 2개 사단만 있으면 8시간 만에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킬 수 있다고 다마스쿠스 진공을 허락해줄 것을 라빈에게 요청했으나 라빈은 시리아 영토를 더는 점령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